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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임용민 종교칼럼]-[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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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는 10여 년간 아직 영적으로 구원함을 받지 못하였던 당시 매우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찬송을 그토록 즐겨 불렀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자 자신의 간절한 소원과 전적인 헌신적 공로와 노력으로 말미암는 철저한 종교적 삶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잠자리에 들기 전 내 자신을 다시 돌이켜보면 내 하루의 삶은 실패의 연속뿐이었고 이를 늘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부족해서 그렇지"라고 생각하고 새롭게 하루를 다짐하며 살아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는커녕 나의 하나님을 뵙거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확신도 없었습니다. 성경도 더욱 열심히 읽고, 기도에 열심도 내며, 남에게 전도도 하고, 교회 일에 더욱 헌신도 해보았지만 나의 구원은 날마다 낙제점이었습니다. 그럴수록 나는 십계명을 더욱 철저히(?) 지키려고 힘썼습니다. 이처럼 나는 내 주께로 가까이 나가기 위해 내 스스로 죄 짐을 걸머지고 힘겹게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5월 1일 밤, 나는 로마서 3장을 읽는 중에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아무리 선하려고 애써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롬 3:10). 다음으로 구원은 내 스스로의 율법의 행위나 스스로의 선한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피로 인하여 비로소 모든 죄 사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롬 3:24-25).

그리고 나의 어깨에 메어있던 나의 죄 짐을 내 구주의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사도바울도 "내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유익하던 나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노라"고 하는 의미기 깨달아졌습니다. 그처럼 새롭게 복음을 깨달은 나는 엎드려 죄인인 자신을 회개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과 구주로 영접함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의 찬송 작사자의 영어 원문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찬송 작사자의 본래의 의미 내용은 이와 같았습니다.

   주님의 곁으로 더 가까이 내 앞에 큰 장애 대적하나

     내 오직 소원은 주께로 가까이 내주의 곁으로 나갑니다.

   저 멀리 보이는 천성 길은 은혜로 내리신 나의 갈 길

     천사 날 부르니 주께로 가까이 내주의 곁으로 나갑니다.

이처럼 비로소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은 사람의 관점에서의 이 찬송은 그 의미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새롭게 즐겨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1. S. 루이스는 이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라 고백하는 자들의 그 생애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독교인임이 틀림없어 보이지만 그 속사람은 여전히 옛 사람의 속성과 욕구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그의 한 발은 이 세상에, 그리고 다른 한 발은 하나님께 걸치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들은 주님과 하나님만을 따르려고 않고 또한 세상만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협적인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그러나 가령 여러분의 마음 밭에 잡초 씨를 뿌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밭에서 밀 수확을 기대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 잡초들을 짧게 깎을 수는 있겠지요. 그래도 그 잡초는 다시 자랄 뿐이며 여전히 밀 생산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밭에서 밀을 생산하기 원한다면 그 밭은 이제 그 표면뿐만 아니라 속 깊숙이 파 해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처럼 옛 잡초 밭의 흙을 완전히 갈아엎은 후에 그 밭에다 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변화의 필요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 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

  전도자 빌립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그 자신이 읽고 있던 이사야 53장에서의 "털 깎는 자 앞에서의 잠잠한 어린 양"은 바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그에게 전해 주었고(요 1:29) 이 같은 복음을 깨달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메시아로 영접한 그 내시는 이제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행 8:39).

  물론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각 사람은 자신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한 자신의 십자가를 담당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우리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그 형벌의 십자가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분명히 전합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전 15:3-4)

  물론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그 진정한 의미는 "너를 위해 내 모든 생명을 바친 나를 위해 너는 이제 네 자신을 나에게 온전히 바치라"라고 하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적 삶의 요구라는 사실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마 16:24-25).


youngandb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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