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는 인생 (Life with No Regre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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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이어서>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갈 무렵부터는 일제의 간섭이 더 심해져서 학교에서 일본어만 사용해야 했다. 또한 교장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이 매일 아침 등교하기 전에 먼저 신당에 가서 신사참배부터 해야 한다고 공표했다. 신사 참배 확인 도장을 받지 못하면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기에 전교생은 그대로 따라야만 했다.
신당은 산 꼭대기에 지어져 있었고, 올라가는 길에는 매우 아름답게 손질된 돌계단들이 놓여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200개가 넘어서, 그 계단을 밟고 신당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학교로 가려면 족히 한 시간은 걸렸다. 매일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산을 오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벽마다 올라가던 그 돌계단은 자주 짙은 안개로 덮여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골고다의 언덕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따뜻한 옷도 없던 때라 꽁꽁 싸매고 여며도 소용이 없었다. 세찬 칼바람 속에 귀와 볼이 새빨갛게 얼어 버렸고,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예외 없이 무조건 매일 올라가야 했다. 겨울에 독감으로 죽음을 맞는 아이들도 꽤 있었으니, 내가 그 시절을 살아남은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극기 훈련이 저절로 된 부분도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매일 똑 같은 체력단련을 하는 셈이었으니까.
아침부터 그렇게 힘을 빼고 학교에 가면 이미 지치고 배가 고파서 학교 공부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체력이 약한 어린 학생들에게는 무리한 요구사항이었지만 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따르는 수밖에 없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것은 벚꽃이 필 무렵의 신사참배가 가져온 현상이다. 일본인들은 신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쪽에 나란히 벚나무들을 심어두었는데, 벚꽃이 필 무렵은 길고 긴 겨울이 물러가고 마침내 따뜻한 봄날이 왔음을 알린다. 겨우내 춥고 힘들었던 것에 비례하여, 연분홍 구름이 내려온 듯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돌계단은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비를 맞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내려, 일제를 향한 그 모든 분노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돌계단을 하얗게 뒤덮었다가 참배객의 발에 밟혀 투명하게 죽어가는 꽃잎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일본인들의 사쿠라 정신에 물들고 마는 것이다. 사나흘 동안 만개했다가 젊음의 절정에서 죽는 인생이 멋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갑자기 스며든 따스함과 나른함이 딱 지금 죽으면 행복하겠다는 식의 허무주의를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봄에 피는 벚꽃을 보면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만다. 순수한 연분홍 꽃들은 아무 죄가 없지만 말이다.
일제가 공표한 또 다른 규정은 모든 학생이 학교에서 일본어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수로 한국어를 한 단어라도 입밖에 내는 순간 심한 벌을 받았고 성적표에 감점요인으로 기록되었다. 왜 내 나라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지, 왜 내 나라 말을 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아야 하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매를 맞고 온 날에는 집에 와서 울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부모님은 명확히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못했다. 우리 모두 일제의 폭력적인 지배와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에, 그 이유를 사실대로 설명할 자유조차 박탈당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특히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왔기에 더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부모님이 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는데 어린 내가 다른 곳에 가서 철없이 발설하기라도 한다면, 아버지는 당장 감옥에 끌려가고 우리 가족 모두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학교의 규정이니까 학생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교에서 한국어를 말했다가 매를 맞는 일은 줄어들었고, 일본어로 말하고 쓰는 것이 더 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에서 효성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는 단동에서 극장을 운영했다. 나는 주말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그 친구를 따라 영화를 보러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만화영화도 그때 처음 보게 되었다. 비록 영화의 내용들은 정치 선동과 선전 일색이었지만, 눈 앞에 펼쳐지는 신기하고 낯선 세상을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한없이 매료시켰다.
월월화수목금금
한국인들에게 닥친 또 하나의 시련은 일본 정부가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이다.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로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인데, 그것은 한국인의 정체성 자체를 말살하여 일본의 종으로 부리려는 정책이었다. 모든 한국인은 개명하여 6개월 안에 시 정부에 등록을 해야만 했고,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내 이름은 명인성에서 ‘아카시 카스나리’로 바뀌었다.
일제는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을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군사로 동원하거나 광부로 쓰려고 일본의 광산으로 끌고 갔으며, 많은 어린 여자아이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데려갔다. 그것이 1910년 한일합병 후 35년 동안 식민지 조선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었다. 혹독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한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을 떠나 중국, 러시아 등지로 갔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가 동경에서 대학을 다니시던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고, 지진과 더불어 화재까지 발생하여 동경의 많은 시설들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때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일본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는데, 내용인즉 지진의 혼란을 틈타 한국인들이 화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우물에 조선인이 독을 넣었다’는 등의 소문은 근거 없는 낭설들에 불과했다.
실제 지진과 화재 때문에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건 일본에 사는 가난한 조선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유언비어를 사실이라고 믿은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마구 붙잡아 대나무 막대기로 찔러 죽이거나 곤봉으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그것이 조선인 학살사건이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조선인처럼 생긴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까지 학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그 속에서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셨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제에 저항하기는커녕 너무나 순진하게 일본식 교육과 정책에 물들어갔다. 넓은 세상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아버지의 눈에는 그것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 달에 한번씩, 학생들은 강제노동 프로그램에 동원되어 모심기, 군사물품 생산공장 근무 등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일제시대 내내 한국인들은 주말이란 개념이 없이 일하면서 수탈을 당했다. 일제가 제공한 달력에는 일주일이 ‘제1월요일, 제2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제1금요일, 제2금요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나서도 제공되는 유흥이라고는 일본 사무라이 역사에 관한 영화, 정치선전용 영화, 전쟁영화, 아프리카 노예상과 목화밭에서 일하는 흑인노예들의 고된 삶에 대한 기록 영화 등이 전부였다. 그런 영화들을 보여주는 목적은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는 날에는, 한국인들은 모두 흑인노예들 같은 처지로 전락할 것이라고 협박하는 메시지도 자주 등장했다.
가미카제 조종사 지망생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대중 소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단동의 일본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그 학교는 일본인 학생들을 제외하면 오로지 소수의 친일파 가정의 한국인 학생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친일파가 아니었기에 나에게는 그 학교 입학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도 나는 그 학교에 들어가고 싶어서 필기 시험을 보았다. 예상대로 필기시험에는 무난히 합격했지만 구두시험이 문제였다. 구두시험이 사실 필기시험보다 더 중요했고, 나와 비슷한 가정의 한국인 학생들은 보통 거기서 떨어졌다.
그 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직접 면접을 담당했다. 그는 나의 입학지원서를 훑어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아버지가 한국 중학교의 교장이 아니더냐? 그런데 너는 왜 거기에 가지 않고 일본 중학교에 오려 하는 거지?”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차라리 내가 무슨 과목을 잘 하고 무슨 과목을 잘 못하는지 물었더라면 얼마든지 쉽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매우 긴장했지만 곧 생각을 정리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교장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 꿈은 가미카제 조종사가 되어 일본 제국을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본 공군에 들어가야 하는데 한국 중학교보다는 일본 중학교에 들어가야 기회가 주어질 것 같아서입니다.”
그 대답이 일본인 교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그 해 일본 중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은 한국인 학생은 단 두 명뿐이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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